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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음악

[Classic] 혁명적인 사랑, 에드바르그 그리그와 니나 그리그

by 문슝1324 2017. 7. 15.

  

 

 

왼쪽 사진은 노르웨이 태생 음악가이면서 유럽의 3대 민속 작곡가(드보르작, 장시벨리우스, 그리그) 중 1명인 그리그와 그의 아내인 니나 그리그가 잠든 묘이다. 그리고 오른쪽 사진은 묘에서 피요르(해협)를 바라볼 때의 경관이다. 그리그가 묻힌 절벽(왼쪽 사진)은 정서남 향으로 일몰 시간에 오른쪽 나무 2그루(오른쪽 사진) 사이로 가장 빨갛게 노을이 비추는 지점이라는데, 그리그는 죽기 전에 자신의 묘 자리를 저렇게 딱 쩜 찍어놨다. 그리고 다 죽어가는 상태에서 친구들에게 "나는 영원히 휴식하고 싶다"고 말하고는 저 곳에 묻어달라고 하고 운명하셨다.

 

노르웨이의 터널 뚫기 최첨단 기술을 자신의 묘에 접목해달라는 그리그의 유언을 듣은 친구들은 그걸 그대로 만들어줬다. 참 손이 많이가는 타입인 그리그도 그리그지만, 친구들도 참 대단한 친구들이지 싶다. 그래도 그리그가 만성피로로 죽었을 만큼 음악에 대한 열정과 애정이 남달랐기 때문에 친구들이 그걸 다 응해줬겠지?하며 이해해본다.

 

그리그의 집안은 매우매우매우 유복했는데, 하늘도 무심하시지 병약한 것도 모자라 152cm로 외소하고 다리도 짝짝이로 태어났다. 근데, 저질체력에 폐렴에 늑막염까지 겹쳐서 폐 한쪽을 떼어 냈는데도 그의 정신력은 강철체력이었나보다. 가문에서 극도로 반대한 이종사촌 여동생 니나 하게루프(Nina Hagerup)와 결혼을 강행했고, 가문의 지원도 없이 병약한 몸을 이끌고 전 세계를 누비며 연주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거냐면, 그리그의 아버지 쪽은 당시 노르웨이 수도였던 베르겐에서 제일가는 부동산 재력가였고, 엄마 쪽은 베르겐에서 제일가는 정치가 사람이었다. 비유를 하자면, 삼성 이재용과 박정희 딸 박근혜가 결혼해서 낳은 아들이 그리그라고 보면 된다. 암튼 노르웨이에서 최고 가문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될만큼 금수저였던 그리그는 한 사람 때문에 자신의 다복한 집안을 등졌다. 이건 고향에서 쫒겨나는 것도 감수해야하는 일이었다. 그만큼 니나 하게루프의 목소리가 아름다웠기 때문이라는데 남아있는 음원은 별로 없다고 한다(니나 그리그는 덴마크에서 유명한 소프라노였다).

 

이런 그리그와 니나 하게루프의 사랑과 결혼은 지극히 평범한 내 입장에서는 가히 혁명적이라 않을 수 없다. 단순히 엄청난 집안을 등졌다는 것만이 아니다. 그들은 온 마음, 온 몸으로 사랑했기 때문이고, 이를 증명할 수 있는 판례자료가 엄연히 현실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1907년 그리그가 죽은 후 몸이 불편한 니나 그리그는 트롤하우겐 절벽에 남편을 묻고, 병원입원을 위해 고향인 덴마크로 떠난다. 하반신이 마비되어 침대에 앉을 수도 없는 니나 그리그는 침대에 누워 하루종일 담배를 피웠다고 한다. 담배연기가 흩어지는 찰나에 그리그의 얼굴 실루엣이 나타나기 때문에 니나 그리그에게 담배는 남편과의 키스인 것이다. 그렇게 몇년을 담배로 죽은 남편을 그리워하다가 어느날 니나그리그는 트롤하우겐으로 돌아간다.

 

하반신이 마비되어 병간호를 해주는 유모와 트롤하우겐 안방에서 살아있던 니나 그리그는 어느날 자취를 감춘다. 몇 년 동안 침대에 앉을 수도 없던 사람이 없어지는 믿을 수 없는 일이 실제 생겼다. 그래서 다들 누군가가 니나 그리그를 납치한 것이라 생각하고 경찰까지 동원되어 찾아다녔으나, 니나 그리그는 살이 찢어지고 피투성이가 된 채 남편이 잠든 절벽 아래 있었다. 이건 판례 자료에 기록되어 있는 엄연한 사실이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 여성이 자신의 육체와 영혼을 다 바쳐서 사랑했던 에드바르그 그리그라는 존재는 우리에게 소중하게 여겨지나보다. 그리그는 24살 때 그렇게 축복받지 못한 결혼을 하고, 가족이 자리잡아놓은 베르겐을 떠나 지휘와 연주를 하며 근근이 살았다. 그럼에도 작곡가로서 발전하기 위해 크리스티아나(지금의 오슬로)에 음악협회를 설립하고 새로운 환경과 접촉에 기민했고, 주로 세계 국가들을 다니며 연주와 작곡을 연구했다.

 

어느 곳에 가서도 그는 항상 자신이 노르웨이 출신의 예술가를 강조했다. 음악을 통해 노르웨이에 문화권이 형성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그래서 프랑스 파리에서는 이런 영향으로 음악기념관들에서 노르웨이 피요르드 사진이 걸려 있다고 한다. 그리그의 이런 문화적 자긍심은 노르웨이가 해외에서 명성을 얻는데 상당히 많은 영향을 줬다. 그럼에도 민족적인 것만을 고집한게 아니라, 다른 나라의 작품들을 접하면서 국제적인 추세를 결합하도록 독려했다.

 

 

사랑하는 아내 니나와 딸도 낳고, 자유롭게 살았지만, 저질체력으로 여러 국가를 전전하면서 불안정한 삶을 지속하는게 쉽지는 않았나보다. 더욱이 딸이 병으로 죽고 니나와도 관계가 악화되어 그는 휴식을 취할 안정적인 집이 필요했고, 30대 중후반(1880년 이후)에는 고향인 베르겐으로 돌아왔다. 그 곳은 베르겐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데, 관광지로 유명해진 트롤하우겐(Troldhaugen)이다. 

 

 

이곳에서 그리그는 안정된 삶을 찾았고, 많은 명곡도 만들었다. 노르웨이 고유 전통음악을 기초로 노르웨이의 인물, 경치, 분위기를 작곡을 하였다는데, 당시 덴마크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노르웨이인들에게 그리그의 음악은 민족주의 의식을 고취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 그리그 부부가 베르겐 거리를 산책하면 아이들이 휘파람으로 그가 작곡한 음악을 불러줬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베르겐 시내에서 그리그의 동상을 많이 볼 수 있었다.

 

 

그리그는 30대 중반 시절(1876년 즈음)에 그의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피아노 협주곡 A minor를 완성했다. 솔베이지의 노래로 유명한 <페르귄트(Peer Gynt)>는 1876년에는 입센의 자전적 극시를 바탕으로 완성했고, 명성을 얻게 되었다. <페르귄트>의 주인공인 페르는 이기적이고, 비도덕적이고, 포악하고, 강인한듯 보이지만 나약한 부정적인 인물이다. (이 때문에 노르웨이 인들에게 비난이 있었음) 부잣집 외아들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재산을 탕진하고 죽은 뒤에 어머니와 가난하게 살았는데, 여전히 게으름뱅이에 허풍쟁이 몽상가면서 싸움꾼 기질이 있어 손가락질 받는다.

 

그러던 페르가 솔베이라는 여자에게 첫눈에 반하는데, 솔베이는 너무 얌전하고 답답한 성격을 지녔다. 이래저래 페르는 숲 속에 오두막에서 혼자 살게 되는데, 어느날 솔베이가 찾아와 같이 살자고 한다. 근데 페르는 솔베이에게 기다리라는 말만 남기고 다른 나라로 돈벌러 떠난다. 미국까지 가서 황금광을 발견해서 돈을 많이 벌고 다시 돌아가려는데 사기와 풍랑을 당해 재산을 탕진한채 만신창이 상태로 노르웨이 숲속 오두막으로 돌아간다. 근데 거기에 솔베이가 백발이 되어 기다리고 있다. 평생을 바이킹처럼 방랑하던 페르는 평생 자신을 사랑한 순수한 솔베이 무릎에서 그녀의 자장가를 들으며 잠든다.

 

아래 동영상은 노르웨이어로 부른 솔베이지의 노래이다. 줄거리에서 솔베이는 복장 터질만큼 답답한 여자인데, 노래는 참 좋다. 페르귄트 4막의 노래인데, 중년인 된 솔베이지가 페르귄트와 함께 지냈던 노르웨이 산속 오두막에서 그를 기다리며 부르는 노래이다.

 

 

 

그리그 음악도 뭐 중요하지만, 나는 그리그 부부의 말년이 중요하다.

 

 

 

Edvard Hagerup Grieg

생애 : 1843년 6월 15일, 노르웨이 - 1907년 9월 4일

주요 작곡 : 제3바이올린소나타, 피아노협주곡

 

 

 

<참고문헌>

 

위키백과

그리그 홈페이지 : http://www.mnc.net/norway/EHG.htm

그리그 박물관 홈페이지 : http://griegmuseum.no

윤상아, 2017, E. Grieg의 <바이올린 소나타 2번, Op. 13>의 분석연구, 경희대음악학과 석사학위논문.

이혜진, 2015, 이야기와 음악의 관련성을 중심으로 한 그리그의 <페르 귄트> Op.23 감상 지도 방안, 한국교원대 초등음악교육전공 석사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