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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영화

구도자형 예술가의 표본 : 영화 <서칭 포 슈가맨>

by 문슝1324 2013. 11. 23.

 

올 늦여름, 춘천 마임극장 앞마당에서 무료로 상영하는 영화를 보러 갔다. 며칠 동안 이것저것 보여준다는데, 서늘한 밤공기 속에서 영화를 본다는 자체가 마음에 들어 그냥 갔다. 무슨 영화가 나오는지도 모르고, 그 자리에 도착해서야 내가 볼 영화 포스터를 봤다. 포스터에는 한 남자가 떡하니 있는데, 겉멋이 가득 배어있는 동남아시아 남자 같았다. 촌스러운 포스터를 보니, 내심 '웬 허경영 같은 인간을 영화로 까지 다루고 그래' 싶었다. 맨 아래에 넣어둔 포스터를 보면 내 심경이 이해가 갈 것이다.

 

영화가 시작됐다. 이 영화에 대한 정보가 얼마나 없었냐면,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화라는 자체에 놀랐을 정도였다. 그 정도로 기대치가 제로였는데, 영화가 계속 진행될수록 놀랍게, 빠르게 빠져들었다.

 

이 영화는 앨범 2장을 남기고, 자신의 공연장에서 자살한 가수의 흔적을 찾아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그래서 영화 중반부까지는 <밥말리>처럼, 이미 세상에 없는 가수의 업적을 대해 헌정하는 기록영화인 줄 알았다. 근데!! 아니였다!! 만인이 보는 앞에서 자살한 줄 알았던 로드리게즈가 내가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살아있다는 것이다. 영화 막바지에는 로드리게즈의 인터뷰 영상까지 보여준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처럼 오싹했다.

 

그러나, 로드리게즈의 주옥같은 노래와 삶의 궤적을 알고나니 그의 환생아닌 환생이 고마웠다. 그의 전설같은 삶의 과정은 <접속!무비월드>의 작가가 쓴 글에 잘나와있으니, 아래 "더보기"를 눌러서 보시라. 나는 이 영화에 대한 감상을 주로 기록해두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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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프타운의 전설

로드리게즈의 1집 앨범, <Cold Fact>(1970)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타운에는 한 전설적인 가수에 관한 이야기가 떠돌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슈가맨이라 소개한 한 남자는, 그 소문만 무성했던 가수의 노래 제목에서 자신의 별명을 따왔다고 말하며 전설의 실체를 소개합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약 40년 전에 '로드리게즈'라는 가수의 앨범인 <콜드 팩트> LP가 남아공에서는 굉장한 인기를 얻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사람들은 희한하게도 그 가수가 누군지는 몰랐다고 합니다. 다들 그저 완전히 수수께끼에 쌓인 인물이란 정도로 알고 지나쳤다는 거죠. 그런데 나중에야 그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으로 밝혀졌다고요. 즉, 로드리게즈가 관중들이 지켜보는 무대 위에서 분신자살을 했다는 겁니다. 슈가맨이라 불리는 그 남자는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붙입니다. "그건 록 역사상 가장 기괴했던 일일 겁니다."

 

 

<Cold Fact>(1970), 그리고 <Coming From Reality>(1971)

1사진 속의 로드리게즈
2로드리게즈가 노래하던 술집, '하수구'
3로드리게즈의 2집 앨범, <Coming From Reality>(1971)

미국 디트로이트에도 '로드리게즈'라는 이름의 가수가 한 명 있었습니다. 마빈 게이, 스티비 원더, 링고 스타 등과 함께 작업한 바 있는 음반 제작자 데니스 코피는, 프로듀서인 마이크 시어도어와 함께 로드리게즈를 처음 만났던 때를 회상합니다. 1968년, 디트로이드 부둣가 근처 '하수구'라는 이름의 술집에 들어선 그는, 손님들을 등지고 앉은 채로 이상한 목소리와 함께 기타를 튕기며 노래하던 로드리게즈를 유심히 지켜봤답니다. 당시에 그런 멋진 가사를 가지고 노래하던 이는 밥 딜런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죠. 그들은 곧바로 앨범 제작에 들어갔지만, 노래가 너무 좋았음에도 도대체 무슨 이유에선지 그의 데뷔 앨범이 성공하진 못했다고 말합니다.
 
로드리게즈가 어떤 삶을 살았을지 짐작해볼 수 있나요? 당시 삭막했던 디트로이트의 도시 정서를 그대로 가사에 살린 로드리게즈의 두 번째 앨범 <Coming From Reality>(1971)를 제작한 스티브 롤랜드는 로드리게즈가 들려준 데모 앨범을 듣자마자 이 노래들의 대박 흥행을 예상했답니다. 그런데 1971년 11월, 막상 앨범이 발매됐을 때는 전혀 그러지 못했죠. 그는 특히 로드리게즈의 마지막 곡이 되어버린 노래, 'Cause'의 가사를 예로 들며 이야기하죠. "그의 노래 가사 첫 구절처럼 말도 안 되게 크리스마스 2주 전에 레코드사에서 소속해지 당하고 말았다."고 말이죠. 이때까지 로드리게즈의 이름과 노래를 아는 이는 미국 내에서 그의 친지 혹은 주변인을 제외하고 거의 없었을 정도로 비참한 흥행 실패였습니다.

 

 

난 궁금해 – 'I Wonder'

1사진 속의 로드리게즈
2케이프 타운의 한 레코드 샵
3당시 남아공 정치의 꼭지점, 피터 윌렘 보타
4인종차별 철폐 시위 모습

미국에서는 인기를 얻지 못한 로드리게즈의 노래가 어떻게 남아공에 전해지게 됐는지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할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이 정말 미스터리로 남을 수밖에요. 레코드점을 운영하는 스티븐 시거맨의 말에 의하면, 남자친구를 만나러 이곳에 놀러 온 미국인 여자친구가 로드리게즈의 앨범을 들고 왔다고 전해진다는군요. 마침 그녀가 가지고 온 앨범을 좋아했던 이곳 친구들이 돌려 듣기 시작하면서 남아공 전역으로 퍼져 나가게 됐다는 거죠. 마치 고전 설화나 옛 신화의 한 장면 같은 전설적인 탄생 비화 냄새가 나기도 하지만 일단 믿어보기로 할까요? 어쨌든 남아공 땅을 밟게 된 로드리게즈의 노래들은 날개 돋친 듯 퍼져 나갑니다.








난 궁금해 / 넌 얼마나 많이 속아봤는지
난 궁금해 / 넌 얼마나 많은 계획을 망쳤는지
난 궁금해 / 넌 얼마나 많이 섹스를 해봤는지


Rodriguez - 'I Wonder' 가사 중에서

음악 평론가 크렉 바톨로뮤의 말에 따르면, 로드리게즈의 노래가 유행처럼 번지게 된 데에는 당시 정치적으로 불안정했던 남아공의 상황이 일조했다고 합니다. 당시 남아공 사회는 인종차별 정책을 유지하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았는데, 로드리게즈 앨범의 가사로부터 억압된 국민이 일종의 해방감을 느꼈다는 것이죠. 모든 혁명에는 주제곡이 있듯이, 남아공에서는 <Cold Fact>라는 앨범이 사람들에게 마음의 자유와 새로운 생각을 제시하게 만들었다는 게 그의 생각입니다.








시장은 범죄율을 속이고 / 여의원은 주저하지
사람들은 성나도 / 투표일은 잊고 말지
시스템은 곧 무너져 / 젊은 분노의 노래 앞에
그건 차가운 사실
아침에 일어나니 머리가 아파 / 침대에서 흘러나와 옷을 뿌려 입고
뉴스를 들으려 창문을 열었지만 / 들리는 건 체제의 블루스뿐


Rodriguez - "This Is Not a Song, It's an Outburst: Or, The Establishment Blues" 가사 중에서

그런데 이 노래만큼은 특정 시대와 특정 장소에서만 해당하는 노래 가사는 아닌 것 같군요. 차가운 진실이라는 말이 더욱 날카롭게 느껴지는 지점이군요. 한편, 남아공 국민들은 로드리게즈의 파격적인 가사로 인해 사전 검열과 같은 움직임에 서서히 눈을 뜨게 되고, 직접 로드리게즈에게서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는 뮤지션들이 그의 뒤를 이어 활동 영역을 공고히 하기 시작합니다.

 

 

지저스를 찾아서

1모습을 드러낸 로드리게즈
2뭔가 수상 쩍은 제작자, 칼라렌스 아반트
31969년 당시의 로드리게즈

 

이쯤 되면 로드리게즈가 대중 앞에 그 육신을 드러낼 때가 됐다는 말이 여기저기서 나올 것으로 예상하기도 하는데, 실제 현실에서는 정말 아무도 그를 찾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의 정체를 끝내 의심한 건 레코드점 주인 시거맨 뿐이었고, 그 때문에 로드리게즈가 미국에서는 앨범조차 구할 수 없는 무명 가수로 살았다는 걸 알아차리죠. 이 사소해 보이지만 너무나도 당연한 의심이 없었다면, 로드리게즈는 지금까지고 그저 전설적인 남아공 가수로 남아 생을 마감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시거맨 일행은 인터넷에 공고를 내고 가사를 일일이 뒤지면서 그가 살고 있는 곳인 디트로이트까지 추적하는 데 성공합니다. 마침 음악평론가였던 크렉 바톨로뮤는 '지저스를 찾아서'라는 제목의 칼럼을 지면에 발표해 그간의 행적을 정리했는데, 그것이 결국은 또 다른 시작이 되고 말았던 것이죠. 그 글을 마침내 로드리게즈가 읽는 날이 올 줄이야.








거리의 아이야 / 집에 돌아가야지
거리의 아이야 / 그러다 혼자 남아
사랑과 이해가 넌 필요해 / 네가 쫓는 죽은 삶은 아냐
집에 가도 머무르진 못해 / 뭔가 항상 널 끌어내니까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지
눈에 가로등 빛을 담은 거리의 아이야
더 나은 걸 찾아 나아갈 준비를 해
 
Rodriguez – Street Boys 가사 중에서

로드리게즈는 용기를 내어 남아공 투어를 계획합니다. 그곳 현지에 도착해서까지 과연 자신을 반겨줄 팬들이 있을지 불안했던 그였지만, 5,000석 규모의 공연장이 순식간에 꽉 차는 모습을 눈앞에서 지켜보며 얼마나 기분이 좋았을까요? 무려 40여 년 만에 되찾은 무대 위에서 로드리게즈가 남아공 팬들을 위해 제일 처음 한 말은 너무나 인상적입니다. 그의 첫 마디는 "살아 있게 해줘서 고마워요." 였습니다.

 

살아 있게 해줘서 고마워요

뭔가를 찾는다는 행위가 의미하는 것은 뭘까요? 우린 늘 뭔가를 찾아 헤맵니다. 잃어버린 것들을 찾기 위해 나섭니다. 자아를 찾기 위해, 혹은 또 다른 무얼 찾기 위해 우리는 움직입니다. 심지어 멀리 우주로까지 떠나기도 합니다. 그리고 가끔 우린 엉뚱한 곳을 향해 쓸데없이 달려가기도 합니다. 그리고 꼭 무겁게 돌아옵니다. 그렇다면 40년이라는 긴 세월을 거슬러 우리 눈앞에 나타난 슈가맨의 실체는 많은 질문과 깨달음을 던져 주지요. 로드리게즈가 이 영화에서 처음 등장하던 장면을 오래 기억하기 바랍니다. 2년 전이나 20년 전이나 똑같이 열어두던 창문 틈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 앞에서, 오늘 노래할 로드리게즈와 내일 노래할 로드리게즈가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는 점을 말이죠. 언제나. 무언가를 늘 찾아 나서는 삶. 당신을 살아있게 하는 건 뭔가요?

 

 

원본 : http://today.movie.naver.com/today/today.nhn?sectionCode=MOVIE_WED&sectionId=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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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주인공인 70년대 가수 로드리게즈가 얼마나 좋은 음악을 했는지, 그 좋은 음악이 시대를 잘 못타서 안타까웠는지에 대한 것들 보다도, 그가 음악을 대하는 태도, 자신의 삶 자체가 음악이 되길 바라는 사람이라는게 너무 흥미로웠고, 감동적이었다.

 

그는 디트로이트 부둣가 근처에서 블루칼라 노동자로 살아가며, 저녁에는 <하수구>라는 곳에서 기타 하나로 자작곡을 부르곤 했다. 그를 알아본 유명 음반 제작자는 앨범을 내자고 했고, 제작자는 로드리게즈가 밥 딜런의 라이벌이 될만큼의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미국에서 그 앨범은 팔리지 않았다고 한다. 근데, 비공식적으로 유입된 남아공에서는 이 앨범을 통해 로드리게즈는 거의 민중가수가 되어 있었다.

 

영화 막바지에는 최근 로드리게즈의 인터뷰 영상이 나오는데, 그는 미국에서 앨범이 안팔린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실망감도 없었고, 남아공에서 민중가요로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다는 것에 대해 엄청난 환희도 보이지 않았다. 영화에서는 몇 년 전, 로드리게즈가 남아공에 가서 공연을 하는 장면을 보여줬는데, 그때 같이 갔던 딸의 내래이션이 기억에 남는다. "아버지는 그 공연을 오래 전부터 준비했던 것 처럼, 어떠한 긴장 없이 자연스럽게 공연을 이끌어갔어요."

 

이렇듯 그는 자신의 예술적 재능에 대한 뒤늦은 찬사를 초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미국으로 다시 돌아온 그는 여전히 막노동, 잔디깎이 일을 하며 딸과 함께 근근이 살아가는 삶에 충실할 뿐이다. 이를 보고 어떤이는 로드리게즈가 구도자 같다고 비유했는데. 백번 동감한다.

 

 

그의 삶, 삶에 대한 태도가 온전히 멜로디, 가사가 하나하나에 투영되기에, 그의 노래가 남아공에서 큰 반향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영화를 보고난 후에 포스터를 다시 보니, 그 겉멋 가득한 한 남자가 아니라 온화한 미소를 짓고있는 표정이 보였다. 이 미소가 앞으로 내게 많은 힘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