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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영화

일상을 낯설게 보는 것만으로 삶은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가 : 연극 <광부화가들>

by 문슝1324 2013. 11. 17.

지난 9월, 혼자 서울로 출장이 있길래 문화생활 좀 해볼까 싶어 연극을 검색했다. 수 많은 연극 중에 눈에 확 들어온 작품이 있어 바로 결재하였다. <광부화가들>이란 작품인데, 영화 빌리 엘리어트극본을 쓴 극작가 리 홀이 썼고, 예전부터 궁금했던 명동예술극장에서 한다길래 구미가 안 땡길 수 없었다. 멋진 작품인 <광부화가들>에 대한 감응에 앞서, 명동예술극장이라는 역사적 문화공간에 대해 잠깐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에 위치한 명동예술극장은 옛 명동국립극장(현 장충동 소재)으로 쓰였던 건물을 복원한 연극전문 공연장이다. 이 명동예술극장이 역사적인 상징이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1970년대 문화예술의 중심지가 명동이라는 점이 작용한다. 혹은 명동국립극장이 있었기 때문에 명동이 문화예술의 중심지가 된 것일 수도 있다. 이건 나중에 명동에 대해 살펴보면서 확인해봐야겠다.

 

각설하고, 2009년에 재개관된 명동예술극장은 단순히 재건축된 공연장 차원을 넘어, 문화중심지였던 명동의 역사성을 복원하자는 상징성이 스며있다. 복원에 참여한 주체들은 명동상가번영회와 예술가들인데, 이들의 구성을 보더라도 이 극장의 지역적 정체성과 예술적 상징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이 극장에 올려지는 연극들은 대부분 삶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담은 고전 명작들을 중심으로 프로그램화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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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명칭 시기 내용
명치좌 1934~1945 타마타 키즈지 설계로 영화관으로 신축, 주로 일본영화 상영
국제극장 1946.01~1947.11 미군정 하에 국내외 영화 및 공연 상영
서울시공관 1947.12~1957.06 서울시의 공관(公館)으로 사용
1956.05 <시립극장>으로 개칭
서울시공관+
중앙극립극장
1957.06~1961.11 피란시절 대구 키네마극장에 상주하던 국립극장이 서울환도 이후 서울시공관에 자리잡게 되면서 국립극장과 서울시공관이 건물공동 사용
국립극장 1961.11~1973.09 서울시공관이 시민회관으로 이전함에 따라 건물은 온전히 국립극장 소유가 됨
예술극장 1973.10~1975 국립극장이 장충동 신축부지로 이전하면서 본 건물은 국립극장 산하 <예술극장>으로 사용
1975.11 장충동 국립극장 건축신축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정부가 본 건물을 대한투자금융에 매각
극장되찾기운동 2003.12 문화예술단체, 명동상가번영회, 예술계 인사들의 명동국립극장 되찾기발원과 노력으로 문화관광부에서 재매입 결정
옛 명동국립극장
복원사업
2004.5 문화관광부의 부지매입 완료
2004.12 삼우설계의 예술의 빛과 시간의 산책을 복원 건축 설계안으로 최종 선정
2005 공사 착수
명동예술극장
개관
2008.6 ()명동.정동극장 통합운영 정관 개정
2008.11 구자흥 명동.정동극장 극장장 취임
2009.6 명동예술극장 개관
2010.2 2극장장 책임운영제 직제 개정

 

 

 

 

이제 연극 <광부화가들> 얘기를 하겠다. 무대 셋팅은 간촐했고, 순전히 배우들의 연기, 대사로 꽉 채워진 연극이었다. 내가 이 작품에 대해 감응했던 것은 연극의 연출이나 연기가 아니다. 이 작품은 예술에서 배제되는 노동자 계급들이 미술작품을 접하고, 창작해가면서 삶에 대한 태도가 달라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이를 통해 예술이 계급적 향유물이라는 물질성을 넘어, 인간에게 있어 어떠한 유의미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데, 나는 이러한 작품의도와 메시지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이 작품 정보를 단순하게 정리해보면, 뮤지컬이자 영화로 만들어진 <빌리 엘리어트>의 극작가 리 홀이 1930~40년대 영국 애싱턴이라는 탄광촌의 실화를 바탕으로 쓴 희곡이다. 줄거리는 리 홀이 영감을 받은 윌리엄 피버(William Feaver)가 쓴 책 <애싱턴 그룹(The Ashington Group)> 요약본을 간단히 정리하여 써보겠다.

 

 

영국 뉴캐슬 지역의 애싱턴 우드혼 탄광 노조 교육부는 지질학, 진화론 등의 주제를 가지고 강좌를 개설했다. 여러 강좌를 구상하던 중 미술강의를 기획하게 됐고, 이에 미술학 석사 로버트 라이언은 탄광 노조의 미술감상 강좌를 맡게 되었다. 예술에 대해 문외한이고, 관심조차 없던 광부들에게 미술작품 감상교육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미술강좌의 선생인 라이언은 광부들에게 직접 그림을 그리도록 하였다. 손을 많이 쓰는 광부들이라 처음 미술숙제는 판화로 내주었고, 기대보다 훌륭한 판화가 나왔다. 이들이 완성한 판화작품 중 하나가 이 연극 <광부화가들>의 포스터(아래 그림 참조)이다. 어쨌든 광부들도 미술작업에 흥미를 갖기 시작하였고, 미술을 통해 노조 동지들의 삶과 가치관들을 서스름없이 이야기하고,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 그룹의 미술 활동은 노동계급의 자기표현의 주요한 사례로 기록되면서 영국 전역에 퍼졌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났고, 애싱턴 그룹의 활동은 중지되었다. 전쟁 이후, 10명도 채 안 된 생존자인 애싱턴 그룹의 멤버들은 작업장에 다시 모여 그들의 미술활동의 의미를 되짚었고, 그리고 연극은 끝난다.

 

우리 긴 인생에 중요했던 것은, 우리가 한 번도 상업적인 그룹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이상을 지켜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경험으로 아는 우리의 삶을, 탄광촌의 지상과 지하의 삶을 그렸스니다. 인생은 흐르고, 우리는 인생을 그립니다. 우스운 것은 어쩌다 그림을 그렸는데, 그게 인생이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이 연극을 쓴 리 홀은 애싱턴 그룹에 대해 알아가면서 존경심이 더 커졌다고 한다. 더 높은 예술 세계를 위해 자신들의 생활을 버리는게 아니라, 예술을 자신의 생활의 한 중심에 두기를 원했다는 점에서 말이다.

 

연극에서 나오는 사건이지만, 광부들 중에서도 특히 미술에 재능을 보이는 사람(올리버)이 있었다. 전업 화가로 지원해주겠다는 기회를 얻게 되는데, 고민 끝에 광부의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 과정을 접하면서 나는 올리버라는 광부가 진짜 예술가의 결정을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예술을 단지 감상하고 거래하는 소비자의 성향을 갖고 있다면, 그들은 예술의 기쁨을 느끼고, 이를 통해 생의 활력을 받는데 더 가치를 두고 있다. 이러한 예술 본연의 가치에 참여하는 실천가이자 실험가, 철학자의 태도는 상당히 특별한 예술가적 재능이라고 본다. 그렇기에 올리버가 말한 우리 그림은 생생한 우리 인생이야. 그보다 훌륭한 건 없어는 정말 기가 막히게 탁월한 대사라고 생각한다.

 

광부화가들은 그림그리기를 통해 인생을 이해하게 된다. 인생이란 누가 잡아내지 못하면 사라져 버리고 마는, 마치 반짝하는 생명의 순간과 같은 것이다. 광부들은 광부로서의 자신의 삶을 그림에 담아내고, 다른 사람들과 나누면서 새롭게 자신의 삶의 의미를 바라보고 있다. 이는 자신과 타자의 시선이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그림의 의미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 광부들이 생산한 미술작품은 우드혼 탄광 박물관에 수장되어 있다고 한다.

 

 

<참고자료>

명동예술극장 홈페이지 http://www.mdtheater.or.kr/

2013, 광부화가들 프로그램 책자